내일 당장 통일이 되면

지리산 노고단 설경4

내일 당장 통일이 되면 북한사람들에게 시급한 일은

거만한 말일지 모르겠지만, 저는 탈북자가 쓴(누가 교정을 보지 않은) 글은 한 페이지를 읽기 전에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한국에 입국한 2만6000명 중 아주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북에서 교육받은 사람이 쓴 글은 아무리 감추려 해도 무조건 티가 납니다. 제가 한국에 입국한 2002년부터 기자를 시작해서 올해까지 해수로 13년째 기자를 하고 있습니다만, 저도 아직 북한 티를 감추지 못했습니다.

이 블로그에 쓰는 글은 데스킹을 보지 않고 제가 쓰고 직접 올리는 것인데, 오래 드나든 분들은 이따금 제가 북한식 표현을 쓰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13년째 한국에서 글을 쓰는 것을 직업으로 삼은 저도 이럴진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교정되기 훨씬 더 어려울 겁니다.  말투, 즉 억양은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빨리 교정되는 사람도 있고, 늦게 교정되는 사람도 있지만, 어쨌든 시간이 해결해줍니다. 그런데 글은 그렇지 못합니다.

결국 문제는 단어 선택과 문법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띄어쓰기도 중요합니다. 제가 탈북자 수기 심사 이런 것도 많이 해봤지만, 탈북자가 쓴 글은 “할수 있다” “하는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많이 드러나고, 또 “었다”와 “였다”의 구분도 보통 잘 안됩니다. 그래서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들이 빨리 한국 사회에 정착하기 위해선 그들이 가장 많이 틀리는 단어나 문법 등에 대해 핵심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남쪽에서 돌아다니는 남북한말 비교를 보면 너무 어이가 없어 말이 안나오는 일이 많습니다.

지리산 노고단 설경4포털에 남북한말 비교를 치면 북한 단어라고 소개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가령 제가 네이버에서 임의로 긁어온 가~관련 표만 봐도 아래와 같습니다. 몇 번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탈북자가 이걸 보면 정말 어이가 없습니다. 최소 80% 이상이 틀린 것들이거든요. 한국도 북한에서 어떤 단어를 쓰는지 모릅니다. 이러다보니 북한에선 전구를 불알이라고 하고, 무리등은 떼불알이라고 한다는 식의 상식 아닌 상식이 지식처럼 돌아다니는 거죠.

몇 년전 제가 이 블로그에도 공영 방송에서도 엉터리 북한말을 가르쳐주는 현실을 지적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만, 북한말 교통정리는 한국 사람이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어학학자라고 해도, 이들은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바로 북한에서 살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말의 사용 빈도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북한어 사전을 갖다 놓고 보아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도 한국어 사전에 실린 용어를 잘 모르는데 말입니다. 반대로 북한에서 한국어 사전을 놓고 남한말-북한말을 만들면 얼마나 제대로 된 사전이 나오겠습니까. 그래서 북한말과 남한말 비교는 한국에서 이뤄진다면 이것은 탈북자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북한 언어학자도 못합니다. 그들은 한국의 언어생활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탈북자들이 한국에 와서 제일 어려운 점이 외래어입니다. 북한말 남한말 차이는 그래도 한 민족이기때문에 대충 뜻이라도 이해하지만 외래어는 처음 듣고는 영어를 모르고선 알 수가 없는 겁니다.

사실 영어를 알아도 어떤 때는 잘 모르죠. 저도 한국에 처음 와서 컴퓨터가 바이러스 먹었을 때 본체를 둘러메고, 컴퓨터클리닝에 찾아갔습니다. 컴퓨터를 깨끗하게 해준다고 이해하고, 저기가 수리소인줄 알았죠. 세탁소인줄 모르고 말입니다.  그 경험담은 예전에 썼으니 패스합니다~..(참 요즘 방송에서 이 블로그에서 제가 체험한 사례를 블로그에 올린 것을 자기가 체험한 것처럼 말하는 탈북자들도 있긴 하더군요. 그건 딴 사람이 겪었다고 하긴 어려운 사례인데…그래도 제 블로그에 와서 보고 있다니 고맙긴 합니다.)

결국 북한말 남한말 비교사전을 만든다면 그건 탈북자가 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도 할 수는 있겠지만, 북한 언어생활을 모른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사전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정착 기간이 오래지 않은 탈북자는 한국의 언어생활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이런 것을 만들기 힘듭니다. 한국 표준어를 익히려면 한 10년은 걸려야 한다고 봅니다.

또 탈북자의 한국 생활 정착에 필요한 용어집을 만든다면 외래어도 들어가야 하는데, 이것도 사용빈도수를 알아야 하는 것은 물론 영어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탈북자 입장에서 어떤 외래어가 어려운지도 겪어야 합니다. 북한도 외래어를 쓰기 때문에 낯선 외래어 가려내는 것은 탈북자가 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북한사람이 한국 생활에 활용할 수 있는 용어집을 만들려면, 대충 이런 조건이 갖춰져야 합니다.  우선-탈북자여야 한다는 것(물론 북에서 고등교육을 받아야 하고요), 둘째-남쪽에서 한 10년은 살아봐야 한다는 것. 셋째-외래어 특히 영어도 잘 알아야 한다는 것… 이 정도 조건은 갖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조건에 맞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저도 한국에서 북한어 왜곡 현상에 분개하다가, 점차 탈북자들의 한국 정착에 딱 필요한 용어집이 없다는 사실에 주목했고(있긴 있습니다만, 제가 보기엔 아주 맘에 안 드는…) 그러다가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작년에 이런 수첩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물론 수첩을 수천 권 찍으려면 적잖은 예산이 필요한 까닭에 발행은 저와 함께 탈북자 구출사업을 같이 하는 단체인 ‘통일시대사람들’이 했고, 저는 주 집필을 맡았습니다.  꼬박 다섯 달 넘게 걸렸습니다. 한국에 발행된 남북한말 사전이든 책이든 아무튼 다 사서 모아 보았고, 단어를 선별하고, 고르고 최종 결정하는 것이 정말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수첩 하나 만드는데 이렇게 시간이 많이 드는데, 사전을 만들려면 얼마나 품이 많이 들까 정말 그 노고를 알게 됐습니다. 수첩인데 책 하나 쓰는 것보다 품이 더 들었습니다.

저는 북에서 살만큼 살았고, 거기서 대학도 나왔고, 북한에서 책도 최소 수천 권은 읽었습니다. 남쪽에선 기자 13년째입니다. 기자는 글쓰는 직업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매일 데스킹에서 교열을 당한다는 점입니다.

탈북자들이 한국말을 잘 알 수 없는 이유는 바로 틀려도 누가 틀렸다고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인데, 저는 10여년을 잘못된 점을 매일 지적받으며 훈련받았으니 이 점에선 메리트를 갖고 있는 것이고, 또 외신기자 10년 했으니 긴급 상황에서 외신을 보며 기사를 쓸 정도의 영어는 됩니다.

자랑 늘여놓은 것 같아 멋적지만, 아무튼 세 가지 공통함수에 근접하고 있는 까닭에, 그런 점이 저로 하여금 사명감 같은 것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이건 바로 내가 걸머쥐어야 할 짐이다…뭐 이런 것이죠. 물론 이런 생각은 몇 년전부터 해왔습니다. 일단 저렇게 만들어놓고 나중에 집체적 의견을 종합해 업그레이드는 해야 할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장성택 숙청으로 12월에 비상이 걸린 와중에 완성하느라 하루 3시간 정도밖에 못자면서 썼고, 12월에 세상에 나왔습니다.

5000부 가까이 찍어서 대부분이 무료 기증으로 하나원에 들어갔습니다. 이제부터 한국에 입국하는 탈북자들은 저걸 한 권씩 갖고 나와 참고하면서 한국 생활에 좀 더 빨리 적응하길 바랍니다.

이번에 사전 만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알게 됐습니다. 몇 십번 살펴보아도 출판된 뒤에 또 잘못된 것이 눈에 띄어 아쉽기도 하지만, 적어도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장담컨대 지금까지 나온 한국어-북한말 관련 책 중에서는 가장 정확하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곱절은 정확하다고 장담합니다. 이제 2쇄를 낼 수 있다면 오류를 바로 잡아 보다 정확한 책을 만들 수 있겠죠.

수첩은 차이나는 ‘북한말-남한말’ ‘탈북자들이 알아야 하는 외래어’ ‘탈북자들이 알아야 하는 문법’ 순으로 카테고리가 돼 있습니다.

1쇄에선 북한단어 600여개, 외래어 1000여개를 실었습니다. 쓰면서 보니 제가 알고 있던 것보다는 의외로 남한과 북한의 단어 차이는 정말 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외래어가 탈북자가 한국에 정착하는 데 가장 어려운 점입니다.

수첩을 만들기 위해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 돌아다니는 북한말-남한말을 비교한 서적, 사전 등을 모두 갖다놓고 단어를 뽑았더니 1000개가 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잘못된 것, 애매한 것들을 다 쳐내고 보니 250여개 정도만 남았습니다. 결국 750개는 엉터리거나 부적절한 비교였던 거죠. 그 250개에 다시 제가 350여개 정도를 추가해 600개를 만들었습니다.

외래어도 한국 사회에 유통되는 그 많은 외래어를 다 보고 딱 필요한 것들 뽑으니 1000개 정도 됩니다.  탈북자들이 가장 많이 틀리는 문법에 대해선 국립국어원에서 남북한말을 연구하는 이대성 연구관님의 도움을 받았고, 표준어 사용의 척도인 KBS 아나운서실에서도 검수를 받았습니다. 사실 표준어 감수 부분은 신문 분야에선 동아일보 어문연구팀이 탑이라 생각합니다만(이건 진심), 소문내기 싫었던 점도 있고, 또 동아일보 기자가 쓰고 동아일보에서 감수 받았다는 것보단 나은 것 같아서요.

이 수첩의 내용을 숙지한다면 북한 주민이 한국에 와서 언어생활에서 어려웠던 점을 최소한 80% 이상은 능히 극복하리라 봅니다. 만들면서 이거 북한에 들어가면 남파 간첩들 한국화 과정 훈련 교재가 되는 것 아니냐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책의 의미는 탈북자들이 한국 생활에 적응하는 데 가장 절실한 문제를 탈북자 스스로의 힘으로 푼 책이라는 데 있고, 실용성을 가장 앞세웠다는 데 있습니다. 겉표지도 ‘북한이탈주민의 한국정착을 위한 용어집’이라고 하면 정확한 표현이지만 들고 다니면 탈북자인 것이 표가 날까봐 ‘남북 필수 용어집’이라고 달았고, 휴대용 수첩으로 만들었습니다.

고민되는 점들이 많았습니다. 가령 북한에서 ‘맛내기’라는 단어는 한국의 ‘미원’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미원은 표준어가 아니고, 표준어는 ‘조미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식당에 가서 “조미료 주세요”라고 합니까. 보통 우리는 미원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이 수첩에선 ‘맛내기=미원’이라고 적고 표준어는 사실 조미료라고 한다 이렇게 첨언했습니다. 이런 점 때문에 KBS 아나운서실에선 표준어가 아닌 것들이 들어갔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다 이런 의견을 밝혔습니다만, 저는 실용성을 우선으로 생각했습니다.

의미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따로 있습니다. 이제 내일 당장 통일이 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한반도의 표준어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는 장담컨대 평양말이 아니라 서울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어도 권력입니다. 북한에서 평양말 쓰는 사람들이 행세하는 것을 보면 그렇죠. 북한 사람들은 강제성이 전혀 없더라도 서울말을 쓰는 것으로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나타내려 할 것입니다. 이런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통일 후 북한에서 ‘서울말=있어 보이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내일 당장 통일이 됐다고 했을 때 한국어를 몹시 배우고 싶은 북한 사람들이 한국말을 어떻게 공부할까요. 바로 오늘 우리 사회에서 탈북자들을 교육하는 책이야 말로 가장 핵심적인 교재가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남북필수용어집’은 당장 내일 통일됐을 때 북한 사람들에게 이걸 보고 한국어를 공부하라고 즉시 배포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하고 휴대성이 뛰어난 교재가 될 수 있다” 이렇게 저는 생각합니다. “통일을 위한 아주 중요한 준비 작업 하나를 내가 했다” 이런 자그마한 자부심 하나를 챙겼습니다.

통일부에서 수십억 들여 만든다는 겨레말사전도 필요는 하겠습니다만, 통일되면 북한 사람들은 속성으로 한국어를 공부해야 하는데 누가 두께가 한 뼘 넘는 사전보고 한국말 공부하겠습니까. 남북한말 막 섞어놔서 구분도 쉽지 않을 겁니다. 또 그런 게 꼭 필요하면 통일돼서 북한 국어학자들 모아 놓고 1년 안에 싸게 만들면 되지요. 그리고 통일되면 북한 사람들이 한국어 배우는 거지 한국 사람이 북한말 왜 배우겠습니까.

“도대체 어떤 꼴로 만들었는지 내가 한번 보고 싶다~…”하는 분들께 말씀드리면, 그런데 여유분이 거의 없습니다. 하나원에 다 갔습니다. 물론 좀 남겨두긴 했습니다만요.

내년에 다시 교정하고 다듬어서 2만6000여명 탈북자들에게 다 나눠주고 싶지만, 많은 돈이 드는 일이라 이건 그냥 제 욕심일 뿐입니다. 하지만 제가 한국에 와서 낸 여섯 권의 책 중에 가장 뿌듯합니다. 내일 죽어도 통일에 중요한 부분 하나는 기여하고 죽으니 말입니다. 통일을 진짜로 대박 만들려면 준비를 해야죠.

올해는 또 어떤 일을 해야 할지 고민 중에 있습니다. 머리에선 몇 개 아이디어가 뱅뱅 도는데, 혼자서 하기엔 너무 벅차고 말입니다. 다만 올해부턴 그동안 바빠서 중단했던 대학원 공부는 마저 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http://blog.donga.com/nambukstory/archives/75309

* 수첩을 꼭꼭 얻고 싶다는 분들이 있어 추가로 붙입니다. 꼭 필요하신 분들은 unianorg@gmail.com에 받으실 주소와 전화번호 남겨주십시오. 수량이 많지 않지만 일괄 발송해 드리겠습니다.

One thought on “내일 당장 통일이 되면

  1. DCP Korea

    거만한 말일지 모르겠지만, 저는 탈북자가 쓴(누가 교정을 보지 않은) 글은 한 페이지를 읽기 전에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한국에 입국한 2만6000명 중 아주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북에서 교육받은 사람이 쓴 글은 아무리 감추려 해도 무조건 티가 납니다. 제가 한국에 입국한 2002년부터 기자를 시작해서 올해까지 해수로 13년째 기자를 하고 있습니다만, 저도 아직 북한 티를 감추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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