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사냥꾼 (이단감별사)의 속성-1

지방교회

 이단사냥꾼(이단감별사)의 속성

예영수 박사

경북대학교. University of Oregon대학교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한신대학교 대학원장 역임
한국기독교영성총연합회 총재
국제크리스찬학술원 원장

■ 한국의 이단사냥꾼은 이단을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특히 영성 있는 목회자들을 사냥하고 있음을 보아왔다. 

[note note_color=”#fdfde2″ text_color=”#000000″ radius=”13″]한국의 이단사냥꾼은 이단을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특히 영성 있는 목회자들을 사냥하고 있음을 보아왔다. 이단사냥꾼의 잘못된 이단사냥 때문에 수많은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이 고뇌에 찬 고난을 당하는 것을 보아왔으며, 그 종들이 섬기는 교회의 성도들까지 고난과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보아왔다. 그래서 필자는 이단으로 송사당하고 정죄받은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보다는, 오히려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정죄한 이단사냥꾼에게 더 문제가 있는 것을 보아왔다. 이단사냥꾼은 싸워야 할 상대를 잘못 선택했다. 진짜 공격해야 할 적(대상)은 사탄과 그의 졸개들과 그들을 따르는 배교자들과 영적 전쟁을 해야 하고, 거짓된 사교들, 거짓된 종교들, 뉴에이지, 세속적 인도주의, 안티 기독교, 예수의 처녀탄생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구속의 진리를 부정하는 저주받을 이단들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했다.

이 글을 쓰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하나는 이단사냥꾼과 그의 똘마니들이 터무니없는 사악한 활동을 중단하고 회개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며, 그래서 이단사냥꾼 자신이 남을 정죄하는 죄의 잔의 분량이 넘쳐서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내리게 되는 일이 없도록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이단사냥꾼의 속성을 앎으로써 이때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그들이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에 대해 자행한 이단 송사와 정죄를 믿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며, 그리고 오히려 이단사냥꾼의 저주받을 이단 사상을 조심하고 규탄해야 한다는 것 때문이다.필자가 이 글을 쓰면서 두려워하는 것은 이단사냥꾼들이 다른 사람들을 송사하고 비판하면서 범하는 오류와 동일한 죄를 나도 범하지나 않나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광의 하나님께서 필자에게 선한 마음을 주시고,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고, 감동 주시기를 기도드리면서 이 글을 쓴다.[/note]

[highlight background=”#000000″ color=”#ffffff”]”변증자와 이단사냥꾼(이단감별사)”[/highlight]

1. 이단사냥꾼(이단감별사)의 명칭

[dropcap style=”default” size=”3″]서구[/dropcap] 교계에서는 자칭 이단 전문가라고 뽐내며 자신만의 편협한 신학 잣대로 무차별 돌을 던지면서 이단 정죄를 업으로 삼는 자를 ‘인격 살해자(character assassinator)’라고 부르기도 하고, ‘이단사냥꾼(heresy hunter)’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단 정죄를 업으로 삼는 자를 ‘이단사냥꾼’이라 부르는 것은 그 속성이 마치 동물을 전문으로 사냥하듯 ─ 미국에서 청교도 신정정치(Theocracy)시대에 마녀 사냥꾼(witch-hunter)이 종교적 편견과 거짓된 조작과, 교권의 엄격성과, 지능적인 공포심 유발로 마녀를 사냥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이단 정죄를 업으로 삼는 자를 ‘인격 살해자’라 부르는 것은 이들이 내던진 이단 시비의 돌에 얻어맞으면, 즉 이들에 의해 교계 신문에 이단성이 있다고 그 이름이 한 번 오르기만 하면, 실제 이단성 여부와는 관계없이, 이단으로 정죄된 자는 변명할 여지없이 인격적인 살해를 당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이들을 ‘이단감별사’라 부르기도 한다. ‘이단감별사’란 명칭은 이단을 감별하는 전문가로 자처하는 자에게 붙인 냉소적 풍자적 명칭인 것 같다.

2. ‘변증자’와 ‘이단사냥꾼’

[dropcap style=”default” size=”3″]먼저[/dropcap]  ‘이단사냥꾼’과 ‘변증자’를 비교하여 차별화함으로써 ‘이단사냥꾼’의 정의를 극명하게 이해한 다음 ‘이단사냥꾼’의 속성을 구체적으로 연구하고자 한다.

제임스 스펜서(James R. Spencer)는 「이단사냥꾼들」(Heresy Hunters)이란 책에서 ‘이단사냥꾼’과 ‘변증자(apologist)’를 구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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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자’는 교리의 문제점과 논쟁점을 제시하고, 어떤 교리는 잘못된(혹은 이단적일) 가능성이 있다고 교리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고, 필요하다면 논쟁까지 하지만, 결코 자신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형제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비판하지 않는다.

변증자는 어떤 목회자가 논쟁의 대상이 될 때, 만일 문제된 교리가 영원한 구원에 필수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먼저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문제를 덕스럽게 해결하도록 노력하고 서로가 논란된 문제에 대해 새로운 통찰력을 갖도록 노력하며, 동시에 서로 다른 주장도 있음을 인식하도록 노력한다. 많은 경우 문제된 신학사상에 관한 사항을 진지하게 토론을 함으로써 서로의 다름이 어디에 있는가를 인식하게 되고, 새로운 통찰력을 갖게 됨으로써 문제가 덕스럽게 해결된 경우가 상당히 많다.

반면에 이단사냥꾼은 어떤 목회자의 작은 잘못을 발견하거나, 자신의 신학 노선이나 교리나, 성경해석이 다른 것을 발견하면, 자신은 심판관의 입장에서 그 문제를 과장해서, 필요하다면 왜곡해서, 심한 경우 거짓말로 조작하여 발표하고 공격의 대상이 된 자의 이름을 무차별 거론하면서 마녀사냥꾼처럼 인격 살해를 자행한다.

이단사냥꾼은 언제나 자신은 심판관의 입장에서 공격의 대상이 된 자를 계속 채찍질하며, 정죄하며, 온갖 동기를 다 찾아내어 TV나, 방송이나 신문이나 잡지 등을 이용하여 무자비하게 영적, 정신적, 심리적 화형에 처해 버린다. 그리고 난 다음 인격적인 살해를 비참하게 당하여 신음하고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희생자의 모습에 승리자로서의 환희의 미소를 짓기도 한다. 말하자면 이단사냥꾼은 자기도 모르게 일종의 ‘강박적 싸이코패스’ 현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변증자는 어떤 목회자의 신앙과 신학 사상의 문제에 비록 결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형제에게 먼저 회개하고, 잘못된 신학(성경 해석)을 수정할 기회를 주도록 방어해 준다. 성경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변증자의 태도를 가지라고 말씀하고 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5-17).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에게는 형제에게 하듯 하고'(딤전 5:1).

형제가 죄를 범하였다고(개인적인 행위나 신학적인 문제나) 의심되는 자에게 먼저 만나서 직접 그 진실 여부를 알아보고 권면하라는 것이다. 문제된 사항을 더더욱 진지하고 조심스럽게 다루기 위해, 온유한 심령으로 서로의 다름을 알기 위한 만남을 가져야 할 것이다. 특히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 하라고 말하고 있다.

반면에 이단사냥꾼(이단감별사)은 자신의 지극히 한정된 신앙적 체험의 바탕 위에서 자신의 편협한 신학적 잣대를 가지고, 대학자나 된 것처럼 우쭐대면서 사소한 일에도 상대방의 약점(?)을 들추어내어 공격하함으로써 대중의 심리를 유도하는 사악한 짓을 한다. 그리고 이단사냥꾼은 자신의 공격의 대상이 된 자를 단체의 이름을 이용하여 ─ 많은 경우 자신은 그 단체 뒤에 숨어서 조종자로 남아서 ─ 이단으로서나 혹은 이단옹호자로 먼저 규정을 해버리고 난 후에 잡지나, 신문이나 라디와나 TV 방송에서 공격해 버리곤 한다. 이단사냥꾼 자신은 하나님과 같은 심판관의 자리에 앉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을 화형에 처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단사냥꾼(이단감별사)의 이런 행태는 공격을 당하는 자의 마음과 심령을 쓰라리게 하여, 마음에 독을 품게 하고, 원한에 쌓여, 마음에 쓴뿌리가 나게 하며, 복수심에 차게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마음에 미움이 차서 살인의 죄를 지을 수 있게 한다. 그 결과 이단사냥꾼은 사람들을 실족케 하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그 목에 연자맷돌이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눅 9:42)고까지 말씀하셨다.

종합해서 정의한다면, ‘변증자’는 논쟁의 대상이 된 자를 분별력을 가지고 충고하고, 바른 신앙 사상을 갖도록 선도해 주는 성숙한 분별력의 은사가(고전 12:10) 있는 자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살리는 일을 하려는 것이다.

그 반면에 ‘이단사냥꾼'(이단감별사)이란 이단 정죄를 업으로 삼는 자로서 다른 사람을 지배, 조종, 정죄하려는 자를 지칭한다. 다시 말하면 선량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사냥하여 죽이려는 것이다. 가징 경건하고 가장 믿음이 있는 체하면서도, 가장 경건치 못하고, 가장 신앙심이 없는 자들, 즉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방해하는 자들을 말한다.

3. 한국교계의 이상한 현실

[dropcap style=”default” size=”3″]이상[/dropcap] 하게도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이단사냥꾼으로 인해 부당하게 이단이란 누명을 쓴 자들에겐 조금도 인내하지 못하면서, 이단사냥꾼에게는 모든 것을 허락하여 가장 악한 방법으로 조작하고 조종하는 일을 하게 하면서, 심지어는 그 귀한 교인들의 헌금까지 수백만원 수천만원 주면서 돕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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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사냥꾼의 무분별한 정죄 행위는 정죄받지 않고 있으며, 그들의 영적 지능적 심리적 폭력 수법과 폭력 행위는 눈감아주고 있다. 이상하게도 그들의 좁은 식견과 잘못된 신학 사상과 거짓된 횡포는 간단한 설명으로 넘어가거나 보호되고 있다. 그들의 위선적인 해동은 너무 교묘하여, 영적인 거룩함의 옷으로 치장하지만 않았다면 이들의 짓거리는 범죄에 해당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고 생산적이고 역동적으로 살아가야 할 수백만의 영혼들이 부끄러움과 두려움과 협박 가운데 살아가고 있으며, 그렇게 위축되어 살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한국의 비극적인 현실이기도 하다. 정말 이단사냥꾼(이단감별사)의 위력(권능)은 가히 전능자의 힘을 가졌는가? 어떻게 그 많은 한국 교계와 그 큰 단체들이 이단사냥꾼의 눈초리와 손아귀에서 놀라고 또한 놀아나고 있단 말인가? 그의 전능자에 가까운 권능에 찬양을 보내야 할 지경이다. 아양을 떨어야 할 지경이다.

4. 참아야 하는 것과 방어해야 하는 것

[dropcap style=”default” size=”3″]대부[/dropcap] 분 하나님의 신실한 목회자들은 이단사냥꾼(이단감별사)으로부터 거짓말과 부당한 비방으로 공격을 당하고도 참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속상하긴 하지만 그 많은 시간과 정력을 부당하게 공격해 오는 자에 대항하여 짜증스럽고 울분에 찬 싸움질로, 헛되게 낭비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보다 많은 시간과정력을 성경말씀을 연구하고 전하고, 주님과의 교제를 위해 기도하고 목회자로서 성도들을 돌보는 일에 값지게 사용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느 목회자든 자신의 신앙사상에 이단성이 있다는 공격에 대해 ─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된 송사든 간에 ─ 그 공격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이단사냥꾼의 음험한 거짓말 섞인 비방으로 인해 자신의 목회에 큰(경우에 따라선 치명적인) 손상과 혼란을 야기시킬 뿐만 아니라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돌보고 있는 성도들의 삶과 신앙생활에까지 알게 모르게 큰 손상을 끼치거나, 회복할 수 없게 훼손해 버리는 일도 일어나기 때문이다. 정죄당한 목회자의 가족들과 후손들은 물론이고, 수만은 선량한 성도들의 삶과 신앙생활에도 너무나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물론 부당하게 송사하는 자들에게 다른 뺨을 대 줄 수도 있다. 그러기에 어떤 목회자들은 부당한 공격을 당하고도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자제와 믿음(?)으로 참고 있다. 그러나 이런 평화주의자들(pacifist)이 알아야 하는 것은 거짓된 정죄를 업으로 삼고 있는 이단사냥꾼에게는 자신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 필요하며, 또한 자신을 방어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거짓말과 불의한 비난을 당한 지도자의 영향 아래 있는 수많은 성도들이 신앙생활에 혼란을 겪게 되고, 삶의 부당한 불이익을 당하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신앙심의 상실까지도 겪는 경우에, 그 엄청난 책임을 지도자는 져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5. 바울은 어리석은 말이나 담대하게 해야만 했다

[dropcap style=”default” size=”3″]이[/dropcap]  시점에서 지도자들은 개인이 갖는 수동자세(pacifism)와 복음을 방어하는 보다 광범위한 문제를 혼돈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고린도전서 4:12-13에서 ‘우리(바울과 아볼로)는 욕을 먹으면 도리어 축복하여 주고, 박해를 받으면 참고, 비방을 받으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표준새번역)라고 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1:21에 ‘원컨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컨대 나를 용납하라’ 하면서, 고린도후서 11:21에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 나도 담대하리라’고 함으로써 담대하게 응답할 필요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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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있는 거짓 선생들과 비평가들로 인해 공격을 받았다. 그들은 바울과 바울의 복음은 교회에 설자리가 없다고 함으로써 바울의 권위와 목회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자신들은 참 목회자요 바울은 거짓 목회자라는 것이며, 그들의 사상은 옳고 바울의 사상은 잘못된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참 권위를 가졌으나 바울은 자신의 권위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은사와 말하는 능력에 비추어, 바울의 볼품없는 모양과 형편 없는 말솜씨를 보아도(고후 10:10) 자기들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자신의 권위와 목회를 방어 해야만 했다. 만일 바울이 자기 방어에 실패한다면, 바울의 비판자들은, 바울의 침묵은 바울의 약함으로 해석할 것이고, 아울러 바울의 목회는 방어할 가지가 없는 것으로 취급할 것이고, 결국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가 아니라고 소문을 퍼뜨릴 것이다.

바울에게는 자신의 목회를 방어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고린도교회를 거짓된 지도자들과 선생들로부터 구해야만 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은 좀 자랑하며 어리석은 일을 할 터이니 어리석은 사람으로 용납하라고 말한다. 바울의 자랑해야만 하는 것은 비방하는 자에 대해 자신을 방어하고, 거짓 선생들로부터 교회를 구하는 길임을 확신하고 있다. 비방자들이 육신의 일(지위와 하는 일)을 가지고 자랑하는 것처럼 바울도 자신의 사역을 좀 자랑해 보겠으니 용납하라는 것이다. 교회가 바보들(거짓 선생들과 지도자들)을 기꺼이 용납하는 것처럼, 바울이 바보짓을 하도록 용납하라는 것이다. 이들 거짓 선생들과 지도자들이 교인들을 종으로 부려도, 먹이로 삼아도, 골려도, 얕보아도, 뺨을 때려도, 교인들이 참는 것처럼 교인들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은 바울을 참아달라는 것이다. 이제 바울은 과거처럼 약하게 굴지 않고, 거짓 선생들과 지도자들처럼 자랑하며, 어리석은 말을 담대히 말하겠다는 것이다(고후 11:16-21).

이제 우리도 어리석지만 바울처럼 당당하게 자랑하며 우리 자신을 방어해야만 하겠다! 침묵만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격언에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라(Speech is silver, and silence is gold.)’라고 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침묵은 금이요, 말은 신성하다(Silence is gold, and speech is divine.)’라는 격언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발췌:이단 최삼경 목사 연구(기독교리서치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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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thought on “이단사냥꾼 (이단감별사)의 속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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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이단사냥꾼은 이단을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특히 영성 있는 목회자들을 사냥하고 있음을 보아왔다. 이단사냥꾼의 잘못된 이단사냥 때문에 수많은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이 고뇌에 찬 고난을 당하는 것을 보아왔으며, 그 종들이 섬기는 교회의 성도들까지 고난과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보아왔다. 그래서 필자는 이단으로 송사당하고 정죄받은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보다는, 오히려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정죄한 이단사냥꾼에게 더 문제가 있는 것을 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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